(1,2,3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터미네이터]는 자기 완결성을 갖춘 영화였습니다. 인간과 기계의 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미래에서 80년대의 현재로 날아온 로봇과 인간 전사가 미래 인간들의 리더를 낳을 한 여성을 두고 싸운다는 이 시간 여행 이야기 속에서 시간은 완벽하게 닫혀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간 여행은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터미네이터가 미래에서 오지 않았다면 인간들의 리더인 존 코너도 태어나지 않았을테니 말이죠.

그랬으니 제임스 카메론이 [터미네이터 2]의 계획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이 걱정한 건 당연했습니다. 속편이 본편의 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진짜 문제는 설정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군더더기가 아닌 속편을 만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카메론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편을 위해 두 가지 변화를 주었습니다. 우선 그는 터미네이터를 착한 쪽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시간 여행 이야기의 설정을 바꾸었지요. 1편에서 완벽하게 닫혀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시간의 순환은 알고 봤더니 끊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2편 끝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인공 지능이 인간들을 정복하는 역사를 바꿉니다. 단일 우주가 갑작스럽게 평행 우주 이야기로 바뀐 것이죠. [터미네이터] 1, 2편을 통해 카메론은 같은 소재와 주제의 앞면과 뒷면을 모두 보여주었습니다.

3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또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정말로 3편이 나올 여지가 없어 보였으니 말이에요. 이 영화의 계획에 정말로 적극적인 사람들은 모두 바닥까지 주저앉은 자기 커리어를 구출할 필요가 있었던 아놀드 슈왈제네거나 마리오 카사르 같은 노땅들이었습니다. 카메론은 당연히 관심도 없었고요. 카메론 대신 [브레이크 다운]의 신인 감독 조나단 모스토우가 이 영화의 키를 잡았다는 소리를 듣자 사람들은 기대를 거의 완벽하게 접었습니다.

그렇다면 조나단 모스토우의 [터미네이터 3]는 이런 시큰둥한 반응을 깨뜨릴만한 영화였을까요? 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예상대로 새롭거나 엄청난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핸디캡을 고려한다면 결과가 썩 좋은 편이라고요.

2.

이 영화의 줄거리는 2편과 거의 동일합니다. 미래에서 사악한 로봇이 또 나타나 이제는 다 큰 어른이 된 존 코너를 죽이려 합니다. 그걸 또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가 막으려 하고요. 이번엔 존의 엄마 사라 (백혈병으로 몇 년 전에 죽은 모양입니다) 대신 존의 옛 학교 동창이었던 수의사 케이트가 존과 함께 달아나는 신세가 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새로운 악당입니다. 존 코너를 저지하기 위해 미래에서 온 로봇 T-X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성형 로봇은 관객들과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영화에 상당한 변화를 주죠. 하지만 이건 원래부터 내정되어 있었던 건 아니라고 하고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도 아닙니다. 비주얼과 이야기의 자잘한 디테일은 달라졌지만 사실 남자 모습을 한 로봇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어요.

보다 중요한 디테일은 이 로봇의 구조인데, 대단한 창의성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로봇을 만드는 대신 안전한 절충주의를 택하고 있으니까요. T-X는 터미네이터처럼 금속 골격을 갖추고 있지만 그 주변을 액체 금속이 덮고 있습니다. 제 눈엔 이게 대단한 발전같지 않습니다. 골격 안에 장착된 무기를 액체 금속 안에 감추고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겠지만 일단 골격이 손상되면 임무 수행에 심각한 지장이 있는 걸요. 차라리 그냥 액체 금속 로봇의 몸 안에 무기 몇 개를 더 집어넣는 게 더 유리하지 않겠어요?

T-X보다 중요한 건 시간 여행의 변이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3편의 시간선은 미로처럼 얽혀있어요. 그건 각본가들이 고도로 복잡한 시간 구조를 짜넣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유는 보다 단순해요. 아무도 그걸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다시 정리해보죠. 1편은 완벽한 순환 구조였습니다. 카일 리스와 터미네이터가 80년대로 돌아와 남긴 모든 것들은 순환하는 시간 속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머리칼 하나, 숨결 하나, 동작 하나하나도요. 하지만 2편에서 등장인물들의 자유의지는 완벽하게 열려있었습니다. 미래를 인지하는 주인공들이 열심히 뛰면 고정된 미래에서 이탈해 다른 미래로 빠질 수 있었습니다.

3편의 우주는? 1편 우주처럼 행세하는 2편 우주입니다. 3편에서 우리는 인간과 기계의 전쟁이라는 미래가 단순히 '연기'되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인간과 기계의 전쟁은 초현실적인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워낙 높아서 2편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싶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듯 해요.

당연히 수많은 질문들이 던져집니다. 2편에서 사라가 어느 정도 역사를 바꾸었다면 3편의 터미네이터는 1,2편의 터미네이터들과 전혀 상관없는 미래에서 온 것일까요? 2편의 사건들로 케이트와 존의 관계가 어긋났다면 원래의 역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3편에서 존과 케이트의 동료들이 살해당했다면 이들이 앞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미래는 케이트가 터미네이터를 보낸 미래와 같은 것일까요? 뭐, 답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럴싸한 정답을 찾아낸다고 해도 그게 과연 각본가들의 의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3.

3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 작품이 1, 2편처럼 진지한 작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편은 SF적인 설정을 바탕에 깐 직설적인 호러 영화였습니다. 유머는 드물었고 대부분 장식에 불과했지요. 터미네이터가 인간성을 얻기 시작한 2편에서는 보다 열린 농담들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 영화 역시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하지만 모스토우의 영화는 세상이 망하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꽤 가볍습니다.

분위기만 따진다면 영화는 1, 2편에서 이어지는 적자가 아니라 패러디 영화처럼 보입니다. 특히 처음에 나오는 자동차 추격장면을 보세요. 이 부분은 2편의 첫 추격장면을 [로드러너 쇼]식 농담들을 섞어 패러디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옆에서 달려오는 트럭의 창문에 개구리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터미네이터의 모습은 정말 한심할 정도이죠. 그밖의 다른 설정들도 농담의 대상이 됩니다. 터미네이터의 선글래스, 이 시리즈의 동네북인 불쌍한 실버맨 박사...

농담이 줄어든 동안에도 영화는 시리즈의 설정을 진짜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제 검증되고 분석되고 비판되고 빈 칸을 채워야 할 예술적 대상이지요. 영화는 역사를 검토하고, T-800를 대량생산하는 공장을 상상하고, 1편과 2편의 중요 장면들과 대사들을 조심스럽게 모방합니다.

이런 성격의 변화는 이 영화의 각본이 기본적으로 팬픽션이기 때문일 겁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이 영화의 각본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까지 1, 2편을 좋아라고 봤던 작가들이 반쯤 존경을 담고 반쯤 도전하는 심보로 쓴 각본인 것이지요. 신선함은 당연히 부족하지만 가치없는 일은 아니었어요.

4.

사람들은 조나단 모스토우의 기용에 실망했지만 그는 자기 일을 했습니다. 적당히 박진감 넘치는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를 만든 것이죠. 하지만 카메론과는 달리 모스토우에겐 우직한 심각함도 없고 금속성의 묵직한 액션의 감각도 없습니다. 영화는 전편처럼 많은 기물들을 파손하긴 하지만 이 영화가 주는 쾌감은 액션의 스타일에서 오는 게 아니라 단순한 밴덜리즘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피곤해 보입니다. 그의 카리스마는 점점 더 떨어져 가는데, 그건 이 배우와 캐릭터의 힘이 젊은 육체의 묵직한 이미지에서 오는 것이지 인간적 성숙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가 여기까지 끌고 온 옛 이미지의 힘은 여전히 영화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다.

닉 스탈과 클레어 데인즈는 능숙한 전문 배우들입니다. 그들은 적당히 심각할 때도 가볍게 농담 따먹기를 할 때도 모두 자연스럽습니다. 에드워드 펄롱의 부재에 실망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배우가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했으니 어쩌겠어요. 순전히 너무 어려보인다는 이유로 탈락된 소피아 부시는 정말 안됐지만, 전 클레어 데인즈가 기관총으로 로봇을 쏴대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본 직후라 지금은 거기에 대해 더 생각할만큼 머리가 똑바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

T-X를 연기한 크리스타나 로켄은 수퍼 모델의 몸매와 드레스덴 도자기 인형처럼 윤곽이 매끄러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의 외모는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합니다. 우선 로켄은 아놀드보다 더 기계같아 보입니다. 이 사람의 로봇 연기도 꽤 설득력이 있고요.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얼굴 때문에 위협적인 느낌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동안이거든요. 소문대로 팜케 얀센이 했다면 훨씬 무서웠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약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계속 이어진다면 이 영화는 과도기적 작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후에 나올 영화들은 지금의 형식을 반복할 수 없을 거고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기용도 가능성이 별로 없을테니 말이죠. 오히려 후배들에게 카메론의 원작을 무시하고 자기 개성을 발휘하는 기회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기타등등

생각해보니, 이 영화는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에 만들어진 첫번째 [터미네이터] 영화입니다. [터미네이터 2]가 이 시대의 문을 연 선두주자이긴 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컴퓨터라는 도구의 가능성은 비교적 제한적으로만 활용되었으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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