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결말을 적었습니다.

영화 제목처럼 림병호(한석규)는 남한으로 귀순한 <이중간첩>입니다. 혁명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을 숨긴 체 중앙정보부의 북파간첩 교관으로 위장하고 있는 중이죠. 당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림병호에게 고정 간첩인 윤수미(고소영)로부터 접선이 들어오게 됩니다. 림병호는 기밀문서를 넘기게 되고 덕분에 남한측의 비밀 작전은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게 됩니다. 조직 내에 첩자가 있다는 걸 눈치챈 정보부는 결국 림병호에게 화살을 돌리게 되는데, 사사로운 정에 매달린 윤수미 때문에 림병호는 북측에게마저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림병호는 어디로 가야 하죠?

1. 어디로 가야 하나?

남북 양쪽의 제거 대상이 된 림병호는 남한에 남아야 할지 , 오해를 풀고 북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지 못할걸 알기에 미련 없이 제3국행을 택합니다. 3년씩이나 이중간첩으로 위장하며 중앙정보부의 늑대 같은 간부들을 속여 온 인물답게 냉철하게 결정하고 신속하게 행동하는 거죠. 비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만 위기를 대처하는 일사불란함은 그를 의지하는 윤수미에겐 커다란 믿음이 될 거예요.

하지만 정작 영화 <이중간첩>은 관객들의 믿음을 의심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맙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는 유약한 리더를 누가 믿을 수 있겠어요. 영화가 방황하는 이유는 림병호처럼 '가지 말아야 할곳'에대한 미련을 단호하게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펼쳐 놓은 이야기에 대한 방향타를 직시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려는 이야기가 <본 아이덴티티>식의 위기에 빠진 스파이물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잘 알아요. 자신의 고용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자, 받은 만큼 복수해 주고 유유히 살길을 찾는 주인공은 림병호와 거리가 멀단 말이죠. 주인공에게 닥친 비극을 오락적 재미로 해소시켜 주는 스파이물이 아닌 시대적인 비극을 아픔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드라마가 <이중간첩>이 가려 하는 제 3국입니다.

따라서 영화는 스파이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장면 곳곳에 끼어드는 액션 장면, 무거운 분위기를 소화시켜 주는 유머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남과 북 양쪽의 적이 된다는 설정은 스파이물로선 최고의 서스펜스 상황이예요. 하지만 <이중간첩>은 이를 오락적으로 악용하지도 않아요. 위기는 쉽게 조성되고, 해결책은 손쉽고 가볍게 마무리되는 선에서 끝을 냅니다. 애초 박진감 넘치는 스파이 영화일 생각이 없으니까 이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2. 버리지 못한 미련

예, 좋습니다. 언제나 스파이 영화만 찍어 대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남북 분단 상황이라는 실시간적 비극을 오락적으로 포장하는 것보단 시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도 좋은 방향 일수 있습니다. 그것은 4년만에 귀환한 한석규를 위해서도 고려되었을 법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결벽적으로 필모그라피를 손질하는 배우에게 촐랑거리는 오락 영화는 어울리지 않을 테니까요.

허나 <이중간첩>은 자꾸만 스파이물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어요.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거예요. 림병호가 동베를린을 탈출하는 도입부와 비장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세요. 이 장면들은 자체만 떼어놓고 본다면 긴박함과 비장미를 잘 표현한 그림 일수 있지만 결코 120분을 넘겨 가며 일장 연설을 한 <이중간첩>의 몸뚱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위입니다. 영화 초반 림병호의 취조 장면이나 간첩을 신고하려다 통조림으로 살해당하는 장면들의 강도 높은 폭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정쩡하게 양쪽 노선을 다 취하려고 폼잡는 통에 영화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되고 말았어요. 스파이 영화로 오해하고 갔다 실망한 관객들에겐 둘러댈 말이 있지만 정작 진지한 드라마를 기대한 관객들마저 눈을 돌리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중간첩>의 진지함이 관객들에게 지루함으로 받아들여졌다는데서 찾아야 할거예요. 120분이 넘는 시간을 연설하면서도 <이중간첩>이 설명하지 못한 여백들이 너무 많아요. (그것은 지금 이 리뷰가 여기까지 왔는데도 별 읽을거리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ㅡㅡ) 윤수미가 림병호에게 느끼는 사랑, 갑자기 튀어나와 모든 사건을 해결해 주는 외신 기자의 정체, 너무 손쉽게 림병호를 포기하는 남측과 북측, 백승철(천호진)과 림병호의 관계, 등등.. 덕분에 마지막에 림병호의 청부살인을 사주한 쪽이 어느쪽이었는지에대한 열린 결말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거죠. 누가 죽였든 뭔 상관이야, 빨리 극장을 나가 싶은데... ㅡㅡ <★★★>

Tip

● 윤수미의 몽타주가 벽에 걸려 있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윤수미 얼굴을 아주 비슷하게 그려 놓은 몽타주였는데, 고소영의 그 복점이 없었죠. 전 코에 점하나 찍고나서, 윤수미를 떠올릴 줄 알았답니다. ^^

●김일성과 관련된 장면이 많이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런닝타임의 문제였다고 하는데, <이중간첩>이 맘에 안 든다고 말한 마당이지만 무척 궁금하군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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