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간첩]은... 말 그대로 이중 간첩 이야기입니다. 80년대 초에 남한으로 위장 귀순한 림병호라는 북한 첩보원의 이야기죠. 구체적인 줄거리는 읊고 싶지 않은데, 원래 제가 이런 걸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 안 읊어도 전혀 상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6,70년대에 줄기차게 나왔던 냉전시대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공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철저하게 따르고 있거든요. [이중간첩]이라는 영화에는 장르팬들이 예측못할 요소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도입부만 보면 결말까지 짐작할 수 있죠.

당시 스파이물들을 기억하세요? 아니, [007]이나 [플린트] 시리즈 같은 스파이 판타지들 말고 르 카레나 린 데이튼 풍의 진짜 에스피오나지물들 말입니다. 선악의 구분이 사라진 위태로운 경계선 위를 뛰어다니다 소모품처럼 하나씩 사라져가던 우울한 남자들의 어두컴컴한 음모담 말이에요.

냉전시대가 끝난 뒤로 이런 이야기들은 조용히 퇴출되었습니다. 이런 장르의 진짜 악당인 거대한 두 제국의 위태로운 체스 게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적어도 80년대 초를 회상하며 21세기초의 관객들에게 어필하려는 시도를 할 분위기 정도는 되는 거죠.

문제는 영화가 그런 기본 아이디어에 안주할뿐, 장르를 넘어서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장르의 형식만 빌린 진지한 드라마를 만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장르의 공식은 결코 얕볼 것이 아닙니다. 장르의 공식은 비슷한 소재나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수십년의 긴 세월을 걸쳐 수렴진화한 결과입니다. 이를 악 물고 연구하지 않는다면 장르 공식의 기본 수준을 추월하기는 쉽지 않아요. '장르 공식'에 불과하다고 무시할만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중간첩]도 장르를 무시한 대가를 치릅니다. 영화는 장르를 넘어서려 하지만 복습이 짧은 덕택에 어쩔 수 없이 고정된 장르의 클리셰에 빠져듭니다. 장르를 무시하고 그를 넘어서려고 했던 이야기가 흘러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장르에 귀속되게 된 거예요.

오히려 깊이는 더 약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르적 완성도는 주제와 캐릭터의 깊이까지 결정하니까요. 베를린 장벽을 넘나들며 존재론적 고뇌에 빠지는 르 카레의 스파이들에 비하면 [이중간첩]의 림병호는 거의 평면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렇다고 이 단순한 남자의 굳건한 신념이 비틀린 상황 속에서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과정이 제대로 묘사된 것도 아니고요. 말만 첩보원이지 전형적인 '한국식 여자 주인공'인 윤수미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이들을 공감가는 인물로 만들려는 몇몇 시도는 그나마 어느 정도 남아있던 캐릭터를 탈색시키는 결과만 가져옵니다. 휴머니즘을 깔려고 했지만 결과는 눈에 보일 정도로 위선적이 되는 거죠.

남은 건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시킨 차별화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별로 건진 게 없는 것 같군요. 전 '귀순용사 임병호'가 따분해하는 시민회관의 청중들 앞에서 태극기를 휘둘러대는 모습을 보고 조금 웃었습니다. 비슷한 일을 몇 번 경험했고 그 장면이 꽤 사실에 가깝다는 걸 아니까요. 80년대 초를 기억하는 관객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즐거워할만한 장면들이 몇 개 더 있긴 하지만 주제와 그렇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는 않죠. 핵심이 되는 줄거리는 지명과 몇몇 세부사항만 차별화될뿐 공식적이며 평범합니다.

배우들 역시 이런 진부함을 특별히 살리지는 못합니다. 한석규는 언제나처럼 모범적인 발성법을 과시합니다만 자기가 북쪽 출신이라는 걸 숨기지 않는 남자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문제가 있죠. 한석규는 이 영화에서 림병호라는 캐릭터에 구체적인 질감을 부여할 기회를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좋은 발성과 모범적인 표정, 몸동작을 보여줄 뿐이에요. 윤수미 역의 고소영은... 너무 어리고 여려보여요. 이런 장르에 어울리는 세월의 더께가 부족합니다.

[이중간첩]은 심심한 영화입니다. 의도는 거창하지만 내용은 공식적이고, 종종 그 거창한 의도 때문에 작품이 '정치적으로 공정한'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밋밋해지는군요. 영화가 펼쳐놓은 큰 캔버스를 다 채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기타등등

1. 화면 비율이 2.35:1입니다. 서울극장 1관과 같은 곳은 알아서 피하시길.

2. 옥에 티라고 생각되는데, 나중에 보실 분들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후반부에서 윤수미는 아버지가 떠난 뒤 이름을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북에서 아버지가 윤수미에게 보내온 편지는 '수미야...'로 시작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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