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얀방]은 원래 6월 개봉 예정작이었습니다. 월드컵 열풍이 예상 외로 길어져서 늦가을로 개봉일자를 옮긴 것이지요. 만약 계획대로 개봉되었다면 안병기의 [폰]과 경쟁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를 그물처럼 얽어매기 시작한 첨단 기술의 산물인 인터넷과 휴대 전화를 소재로 한 두 편의 한국 호러 영화들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었다면 꽤 재미있었을 거예요. 할 이야기도 많았을 거고요.

[폰]처럼 [하얀방]도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초자연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마리 산부인과라는 존재하지 않는 산부인과의 사이트를 클릭하는 여자들이 모두 이상한 방식으로 죽어가는 거죠. 직장 선배의 아이를 임신한 우리의 주인공 수진 역시 마리 산부인과의 사이트를 방문했다가 자신의 죽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희생자들은 모두 사이트 접속 후 보름 뒤에 죽었으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사이트의 비밀을 풀어야 하겠죠?

영화의 기본 아이디어는 [피어닷컴]과 닮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놀랍지도 않은 우연에 불과합니다. 소재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방법엔 한계가 있고 인터넷 호러는 아직 초창기이니 사람들이 가장 쉬운 길을 택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죠. 오히려 직접적인 영향은 [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전자 제품과 관련된 초자연적인 저주에 말려든 주인공이 데드라인을 남겨놓고 싸운다는 이야기잖아요. (흠, [피어닷컴]도 마찬가지였나?)

러닝타임을 다양한 쇼크로 채워넣으려던 [폰]과는 달리 [하얀방]은 비교적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자극을 꽤 넣긴 했지만 공포와 혐오가 아닌 다른 감정 역시 끌어내려고 하는 것이죠.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슬픔과 동정은 공포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덕택에 영화가 조금 더 묵직해지고 표현폭도 넓어졌어요. 덕택에 하얀방의 이미지는 꽤 괜찮고, 핵심이 되는 진짜 방의 이미지도 상당히 강렬해졌어요.

하지만 아무리 아이디어와 의도가 좋다고 해도 그게 꼭 현실화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일단 영화는 굉장히 헐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야기가 영화의 러닝타임을 충분히 지탱하지 못하는 것이죠. 수진의 모험은 종종 흐트러진 이야기 줄기 때문에 당위성과 정서적 힘을 잃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핵심 줄기여야 할 '오피스텔 이사'죠. 전개상 꼭 필요한 장면이지만 전후 맥락이 충분히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주인공이 이미 고정된 플롯에 질질 끌려다닌다는 느낌을 줍니다. 전체적으로 각 시퀀스간의 연결이 약해요. 방송국 PD인 수진과 사이버 수사대의 최형사가 마리 산부인과 사이트의 비밀을 푸는 [수사반장]식 스토리도 생기가 없고 기계적입니다. 첫번째 살인과 수진을 연결하는 우연도 설득력이 없군요.

주제와 소재가 얼마나 맞아떨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만 합니다. 얼핏보면 태어나지 못한 아기의 존재와 산부인과의 연결은 비교적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이게 인터넷 사이트로 넘어가면 사정은 조금 다르지 않겠어요? 호러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정도는 되어야죠.

배우들은 [폰]보다 낫습니다. 적어도 이은주(A)는 하지원처럼 작위적인 연기를 보여주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아주 좋았다고도 못하겠어요. 이 배우의 연기는 내용에 따라 상당히 호소력 있을 수도 있고 가식적으로 떨어질 때도 있는데, [하얀방]에서는 그런 가식에서 간신히 벗어난 듯 합니다. 나머지 배우들은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없지만 별다른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들의 존재를 충분히 살릴만큼 각본이 입체적이었던 것도 아니고요.

[하얀방]은 결과보다는 아이디어와 의도에 더 주목할만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주목하더라도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라고는 못하겠더군요. 게다가 한국 영화들이 당연하다는 듯 끌어오는 징그러운 모성 예찬과 '출세하고 싶은 싸나이'의 끔찍한 멜로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적극적으로 따분해지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다들 왜 아직도 여기 붙어 살고 있는 건지.

기타등등

카일 쿠퍼의 아류인 오프닝 크레딧을 보고 있으면, 감각을 모방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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