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이 언급됩니다)

어린 소희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화성에 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소희를 위해 승재는 화성발 편지를 대신 써주고 있고요. 소희가 서울로 전학을 간 후에도 지구와 화성 간의 편지 왕래는 계속됩니다. 편지 자체를 좋아하게 된 승재는 결국 우체부가 되고 소희는 '시골처녀 도시 성공기'의 순서를 착착 밞아나갑니다. 무난하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갑작스런 굴곡을 보이는 지점은 승재를 까맣게 잊고 살던 소희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부터입니다. 고향에서 변하지 않은 건 약국 간판이나 원두막뿐만이 아니었으니까요. 소중하게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던 승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죽어야 하지?

<화성으로 간 사나이>는 착한 남자와 나쁜 척 하는 여자의 멜로 영화입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순수해. 나까지 맑아지는 느낌이야' 라는 소희의 대사처럼 승재는 전례없이 착한 캐릭터로 일관합니다. 편지 덕분에 소희와 소통할 수 있었고 그래서 결국 우체부가 되었다는 설정은 사랑에 대한 승재의 굳건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설정이죠. 하지만, 극단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해요. 대개 극단적이면 단순한 결론으로 향할 우려가 있습니다. 만약 승재가 '착한 남자'가 아니었다면 필시 승재의 짝사랑은 스토킹으로 변질할 가능성이 큽니다. 좀 무시무시하죠.

하지만 승재는 소희와 잠깐 나눈 키스 한번에 그녀를 소유했다고 믿는 순진남입니다. 키스라는 상황 하나를 두고 승재는 사랑의 결실로 여기지만 소희는 단순한 스킨십이상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건 바로 이후부터입니다. 스파크를 일으키며 충돌하는 두 캐릭터가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 그게 궁금한 거죠. 그것의 결론이 화합이든, 용해든, 소멸이든 결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불꽃을 튀기며 뒤엉키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거 예요.

뜻밖에도 영화는 승재의 자살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후다닥 마무리해버립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절실함을 설명해주지 않고 승재를 퇴장시켜 버린 덕분에 승재는 영화가 끝난 뒤 재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 남자 착한 게 아니라 소심했던 거구나... '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한 건 장엄하고 비극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상황은 이와 달라요. 소희로부터 된서리를 당한 승재의 절망은 다른 기회를 통해 보상받을 정도로 사소합니다. 사랑에 목숨을 건 사내가 단 한번의 좌절로 자살까지 한다는 건 어떤 상황이든 납득하기 힘든 일이죠. 영화는 승재를 불멸의 사랑을 간직하고 떠난 열사로 포장하지만 죽음 자체에서 속빈 깡통소리가 나니 제대로 살아날리 없습니다. 대신 '왜 죽어야 하지?'라는 영화 흥행에 쥐약을 뿌리는 질문만이 맴돌게 되죠.

오히려 영화가 잠깐씩 살아있는 부분은 승재와 소희의 맥빠지는 로맨스가 아니라 승재를 짝사랑하는 약국 아가씨의 작은 에피소드들입니다. 승재를 보기 위해 보지도 않은 잡지를 열 개씩이나 구입한다거나, 피로 회복제로 사랑을 표현하는 이 아가씨의 행동들은 물론 진부하지만 공감대 형성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역시 진부한 착한 남자와 나쁜 척하려는 여자의 소심한 멜로보다는 훨씬 들여다 보고 싶은 이야기죠.

꼬박꼬박 화성에서 답장을 보내주던 아버지가 실은 이웃집 오빠였다는 반전처럼 <화성으로 간 사나이>는 그 속내가 썩 유쾌한 결말로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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