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방학 때 볼만한 비디오를 추천하는 기획기사에 나는 최근 내가 2달 동안 본 비디오들을 짤막하게 소개하려 했다. 그런데 이 싸가지 없는 비디오 가게 점원이 하도 불친절하게 나와서 머리 밖으로 나간 성질 추스리느라 정신 못 차리고 비디오 대여 목록을 확인하지 못하고 그냥 왔다. 2001년 12월 31일 새벽 1시 40분 경에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내가 놓칠 뻔 했기 때문에. .) 비디오 두 편을 간략히 소개하려 한다.


<소름>

사실 이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이유는. .

첫째, 윤종찬 감독의 단편 영화에서 주제에는 심히있고 공감하지만 표현 방식이 마음에 안들었다.

둘째, 잘못 길 들어졌는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인식의 방식이 잘못 된 건지 모를 주변의 몇몇 어설픈 영화 매니아들이 꼭 보라고 추천을 했다. 그 얘기 듣고 나니까 정말 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하지만 비디오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극장에서 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됐다.

이 영화, 공포영화는 아니다. 굳이 장르를 따질 필요도 없이 내가 보기엔 그저 드라마다. (사실 전문가들이 장르 구분을 쉽게 해서 그렇지 그들이 정의 내리는 장르의 특성을 들어보면 우습기 그지없다.) 그저 그 드라마가 마치 스릴러처럼 많은 복선을 갖고 있고 마치 공포 영화처럼 가끔 등골이 오싹하게 만들뿐이다.

난 첫 번째 시퀀스를 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우스운 게 아니라 웃겼다. 베르그송의 <웃음>을 읽고는 '분명히 이 인간은 사람 한 번도 못 웃겨봤을 거야. .'라며 쉽게 조소해버렸는데 <소름>의 첫 번째 시퀀스의 웃음이 베르그송이 말했던 바로 그 텍스트대로 웃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 나는 깜짝 놀랐다. 사고 난 배달원을 보며 웃는 주인공과 손님. 너무나 시원스럽게 영화를 볼 시각을 잡아주고도 명확한 주장이었다. 그 명확하고도 명쾌한 그 주제는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잠시 이야기에 대해 놓치고 있을 때는 너무나 사실적인 비쥬얼과 주변 인물들에 눈을 고정하게 되고 이야기에 대해 다시 신경을 쓰고 있을 때 영화는 힘있게 달려나간다.

대종상에서 장진영씨가 여우 주연상을 받아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혹시나 보지 않았다면 정말 주저 없이 추천한다.


<일렉션>

내가 요 근래에 본 비디오들은 거의 대부분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비밀의 화원>, <13층>을 제외하고는 <아바론>, <더셀> 등을 비롯해서 주변의 강력한 추천에도 불구하고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역시 나를 크게 만족시키지 못했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찬찬히 뭘 빌릴까 고르고 있으면 느낌에 확 꽂히는 비디오가 가끔 있다. 그런 비디오는 실망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렇게 느낌이 오는 날이 많지 않아서 자주 실망하게 된다. <일렉션>은 그리 호감이 가지 않았다. 주걱턱 같은 리즈 위더스푼도 별로 관심 없었고, 항상 비슷한 연기만 보여주고 그리 뛰어난 영화를 찾는 재주도 없어 보이는 매튜 브로데릭까지. . 하지만 이 영화 역시 놓치기 아까운 영화다.

난 영화를 보면 그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얼마나 이해를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영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감독 중 한 명이 스티븐 소더버그다. 그는 화면의 분할에 대한 이해,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심리에 대한 이해를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감독은 어떤 주제로 영화를 만들던지 상당한 실력을 과시하기 마련이다. 내가 이 얘기를 갑자기 꺼낸 이유는 <일렉션>을 보고 이 감독이 영화를 상당히 많이 이해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 영화에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물의 설정과 그 인물들의 행동에 있다.

극중에서의 리즈 위더스푼은 친구 없고 악착같은 여학생을 연기하는데 이런 사람은 주변에 꼭 한 명씩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떠한 경위에서 그런 행동을 시작하게 됐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행동은 늘 뻔하다. 그러니까. . 늘 악착같은 게 일관 돼 있다. 하지만 이 캐릭터를 살리는 데는 주변 상황이 아주 크게 작용을 한다. 난 절대 이런 여자가 다시 여성스러워진다거나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끼는 영화를 보고 싶진 않다. 역시 이 영화는 그런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어쩌면 그 절묘한 미쟝센이나 하나 버릴 것 없는 대사들. 그리고 자연스러운 듯 정확한 배우들의 움직임처럼 감독은 완벽하게 나같은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는 듯 싶다.

내용은 미국에서 많이 만들어지는 10대에 관한 소재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보인다. 정말 사람다운 선생. 악착같은 학생회장 후보. 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축구를 못하게 되자 선생의 말도 안 되는 설득에 의해 학생회장 후보로 나가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에게 애인을 뺏겨(?) 학생회장 후보로 나가는 여동생. 이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그다지 절묘하게 이야기를 맞추며 그 연관성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려 노력하지 않는 이 영화는 단지 그들만을 보여주면서 웃음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인간'이란 것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크게 동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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