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와 가타야마, 그리고 이시이와 마쓰하라를 보면서 히비야 공원의 거대 실체를 둔 아사히중앙은행(ACB)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썩지는 않았구나 하고 방심하는 순간. 주술처럼 병들어간 구세대의 자기지분 지키기는 한없는 나락을 부르고, 그들을 둘러싼 압력의 실체들은 좀처럼 주도권의 행방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이제 본산을 낼 마지막 히든카드는 결국 다시 샐러리맨들이 양심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다.

영화를 보면서 난 내내 허영만의 '오!한강'을 떠올렸다. 뻔뻔하게 닮은꼴 얘기라고 넌지시 던져 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나의 능청스러움이 너무도 부족하지만 권력에 대한, 혹은 보이지 않는 검은 손에 대한 막막한 답답함에 대해서는 두 이야기의 줄기가 한 곳으로 치달은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결국 그들은 정치 9단과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쥬바쿠'는 총회꾼과 대장성이라는 일본의 금융계를 배후 조종하며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는 두 조직과의 거대 암투를 기본 줄거리로 고질적인 자신들의 병폐에 관하여 폐부를 도려내듯 일침을 가한 1997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는 사실에 관한 진지한 접근의 허용을 일본경제의 위선에 맞선 4인의 아사히중앙은행 중간급 간부로 제한한다. 그 이상은 모두 유머로 대체되며, 영화는 유연함을 얻기 위해 스스로도 신중할 만큼 이야기와 인물에 매우 세심함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러한 효과가 시사성 영화라는 특성을 무시한 잔재미에 치중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는 것 또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다. 그것은 마지막 주주총회 장면에서도 드러나는 과실이다. 소액주주의 엉뚱한 한 마디가 주총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는 설정은 헐리우드의 영화에서 많이 보아 왔던 해피엔딩의 공식이 아닌가 싶어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한다.

또한 '쥬바쿠'는 가장 현실적인 소재에서 그 내용을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안고 있는 영화이다. 그것은 인물들간의 복잡한 관계 설정에도 기인하는 점이지만 스캔들이라는 모티브를 꺼내고 요리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경위에만 관심을 두고 인물 사이를 배회하는 스포트라이트가 없었다는 점이 흥미를 반감시킨 요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영화적 장치들을 고려해 서스펜스나 스릴러등의 유사장르를 혼합, 엉뚱하게 버무려 보려는 한탕(?)식의 제작 기법을 차용치 않은 선택은 '쥬바쿠'를 '쥬바쿠' 자체로 빛나게 하는 드라마틱한 구성의 참맛을 더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매력 있는 연출 이였다고 본다.

일본의 독특한 기업구조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영화는 졸음을 몰고 오는 수면의 마법과도 같은 '쥬바쿠'를 몰고 올 테지만, 이웃한 우리의 유사한 기업환경과 작금의 기업 현실은 결코 쉽사리 이 영화를 넘길 수 없는 미련을 드리우게 만든다. 마지막 기타노(야쿠쇼 코지)의 의문에 가득찬 눈빛을 담은 장면은 영화가 담을 수 있는 진실의 한계점을 보여주는 것 같아 깊은 여운으로 뇌리 속에 자리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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