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호들갑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지만, 세기 전환기의 근심과 불안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토드 헤인즈는 이 세기말적인 정서에 값하는 썰렁하고 우울하기 그지없는 한 편의 영화를 내놓았다. 예고 없는 우울증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는 캐롤은 현 남편과의 재혼이 주는 암시를 제외하고는 불행할 이유가 없는 부유한 환경 속의 여성이다. 의학적으로 지극히 정상이라는 의사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시로 원인 모를 코피를 쏟고 갑작스럽게 울음을 터뜨려 주위 사람들을 난처하게 한다. 토드 헤인즈는 세기말의 우울함과 불안을 한 여성에게 이식시켜 세계의 보이지 않는 폭력성, 비인간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얼음처럼 차갑고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집의 인테리어들과 공평무사함으로 치장한 냉담한 인간관계들이 그녀를 병들게 한 것이다. 세계에 더 이상 안전지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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